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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4 온가족예배[마4:12-17_새로운 세상이 밀려온다]
한광수 담임목사 2021-02-14 추천 0 댓글 0 조회 866
[성경본문] 마태복음4:12-17 개역개정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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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17 새로운 세상이 밀려온다 2021214

 

생존 게임(서바이벌 게임)의 세상 =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세상

여러분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나요? 아니면 이대로 만족하고 계십니까?

 

설날이 되면 우리는 항상 새로워지려는 맘으로 가득합니다. 인사 합니다.

새해 ! 입니다

새시대 이발소에서 머리깍고,

새마을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새로나 양복점에서 단벌로 쫘악~ 빼입고

새롭게 맘먹고 시작하면 새로운 세상일까요? 그런데  작심삼일??

 

좋은 세상! 새로운 세상! 천국은 성도들에게 통상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천국은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라는 장소의 이미지로 이미 굳어져버렸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교회에서만 갖고 있는 생각입니까? 세상의 상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현실과 천국을 이원화 시키는 오류를 낳았습니다. 현실은 현실대로 챙기고 천국은 천국대로 챙기겠다는 종교적 욕심입니다.

그러한 욕심조차도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 현실입니다.

 

예수님과 천국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을 말하는 걸까요?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으니 빨리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자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종말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회개가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예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생명도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믿음과 소망도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의 시작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천국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세상의 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1:2)을 발견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개선되어 살기 좋은 형편으로 바뀌는 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새 시대란 시대의 본질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은 오직 생존을 위해떡으로만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자신의 복을 구하고 세상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다른 세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세상입니다.

천국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성육신,십자가,성령보내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세상을 누가 볼 수 있을까요?

천국은 누구에게 밀려들어갑니까?

기존의 세상의 악함을 발견하고 소망을 새로운 세상에 두는 성도입니다.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은 자

4: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입니다. 3:2>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세상의 실상을 외치면서 자기 죄를 자복한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힙니다. 그것도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반한 헤롯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보는 세상의 실상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망과 기대가 무너져야 새로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있어요.

그들이 바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15)였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16)고 말씀합니다.

 

왜 그들이 흑암과 그늘에 앉은 백성이며 사망의 땅에 거하는 백성들입니까?

그들이 바로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되던 변방 지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변방 지역은 오래전부터 이방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서 이방의 영향을 받아 이방의 문화에 많이 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지역의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다름없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큰 빛을 보았고,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하늘의 큰 빛은 정통을 자랑하는 자신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하신 정통 이스라엘로 여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정통유대인이 아닌 변방사람들이야 말로 하늘에서 비취는 큰 빛을 빛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기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내어 놓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내세울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어 놓을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려주신 빛을 바라보게 되고 그 빛만을 의지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에 거하는 세상이 알아볼 수 없는 빛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인 모습??의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과연 누가 빛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을 빛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생명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흑암에 앉은 자신의 처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흑암에 앉았고 사망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신을 구출할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그분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더 이상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의 믿음은 자신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활동과 실천을 믿는 것이었고,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을 믿는 것이 기존 세상의 믿음입니다. 세상은 이 믿음으로 신에게 나아가고자 했고, 신은 자신의 믿음을 보시고 복을 내려주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믿음은 그동안 믿었던 자신의 의와 실천과 선함이 모두 악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그 모든 악함을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이고,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보아야 하는 것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앉아있는 세상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을 잡아 죽였던 것이 예수님 당시의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금의 세상입니다.

지금의 세상 또한 예수님을 환영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형통과 편안함과 복을 위해서 활동하시는 예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세상 모든 것을 악한 것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조차도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앉아 살아가는 곳이 이처럼 악한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세상으로부터 거두어지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에 기대를 걸고 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보다 생존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존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 문제를 생존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위기가 무엇일까요?

경제문제나 질병문제입니까?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여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로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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