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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온가족예배_요16:16-23[지금의 근심이 영원한 기쁨을 가져온다!]
한광수 담임목사 2021-02-21 추천 0 댓글 0 조회 671
[성경본문] 요한복음16:16-23 개역개정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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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23

지금의 근심이 영원한 기쁨을 가져온다!“

2021221

 

고진감래(苦盡甘來). 쉬운 말로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말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만남 속에서~ 가족 만남, 친구, 연인, 이웃 등

 

문제: 갈등 언젠간 헤어져야 한다는 데 문제, 고통! 이별?? 죽음??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만남과 헤어짐이 늘 반복하여 일어납니다. 가까이는 가족으로부터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연인친구와 직장 동료들과 이웃교회 안에서 성도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만남은 기쁨이지만, 헤어짐은 슬픔입니다. 물론 헤어짐이 슬픈 것은 사랑하는 사이에 한해서입니다. 미운 사람일 것 같으면 헤어짐이 기쁨이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일 것 같으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나에게 유익이 되면 만나고 해가 되면 안 만납니다. 얻을 것이 있으면 찾아 가고, 잃을 것이 있으면 숨어 버립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철저하게 자기 손익계산으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이별(離別)이 뭘까요?

갈라지기 싫은데 갈라져야 하는 아픔이에요. 슬픔이에요.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별이 싫은 겁니다. 죽음두려운 것입니다.

 

 

<선악과>

 

이렇게 인간에게 이별의 두려움을 안겨다 주는 죽음은 어떻게 왔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두렵기 시작했습니다.

 

- 치마 입는 행함으로 해결??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자기 식으로서의 믿음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아담은 두려움을 치마로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담은 치마를 해 입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담의 착각이에요. 착각이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아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담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아담에게 있어 치마란 자기 행함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이 방법으로 두려움을 쫓아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본능에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 행함으로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 철학으로 해결?

철학은 자기주체로부터 출발해요. 그래서 철학에선 끝없이 질문하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주체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철학을 하면 할수록 자기 주체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내가 바라나 잠시뿐이고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 함께 결속함으로 해결?

바벨탑을 쌓을 때도 헤어짐을 면하자고 했어요. 두려워서 뭉쳤습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존재. 집단 속에서 안위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족을 이루고, 이웃을 만들고,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집단 속에서 안위를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본문 상황 : 제자들

지금 제자들도 예수님과 이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픈 겁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을 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늘 아래 보호 받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지금 떠나시겠다고 합니다. 이별을 고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어서 자신들을 떠난다는 말은 자신들의 죽음과도 같이 슬픈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자신들은 고아처럼 버려짐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근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뭘까요?

지금까지 누리던 영화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어요.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우쭐했어요. 잘난 척 했어요.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았어요. 아픔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으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어요.

그러니 제자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계속 남아서 갖가지 기적을 베풀어 주기를 바랐어요. 그래야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러운 일들이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없으면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어요.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서 육적인 안락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곧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예수를 이용하여 등 따숩고 배부르기를 원하잖아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그냥 죽고 만다면 무엇 때문에 오신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는 일을 하다말고 어디를 가신단 말입니까?

기대감이 무산되니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이 무너지니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신앙으로서의 헤어짐과 만남

그런데 말이죠. 하지만 신앙에 만남과 헤어짐은 다릅니다.

나의 유리와 불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만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쓰임 받는 삶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유리와 불리를 따지지 않아요. 다만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쓰고 계실 뿐이에요.

 

저도 수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여 왔어요. 처음엔 속상하고 아프고 힘이 들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해요. 그만큼 맷집이 생긴 겁니다. 맷집이 생기다 보니 이젠 헤어짐이 예전처럼 아프지 않아요.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시는 훈련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갈라놓고자 하십니다.

새로운 일을 꾸미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떠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로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의 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하신 첫 마디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건 생이별을 시키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떠남이란? 죽음을 상징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이별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속하게도 이러한 인간의 아픔도 모른 채 아브라함을 부모 친척 고향으로부터 떠나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야속합니까.

 

이처럼 아프고 눈물 나는 이별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에게 필수 코스처럼 다가와요.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납니다. 자의에 의하여서도 일어나지만 타의에 의하여서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만나게도 하시지만 또한 강제로 헤어지게도 하세요.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구요??

16: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곡하겠느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조금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있으면 나를 보리라

가신다는 것은 무엇이고! “또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떠나가심죽음이라고 한다면! “다시 오심살아나심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었다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다는 것은 죽음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가신다고 하니 근심하고 슬퍼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우리 선생이 왜? 저러느냐고 웅성거립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하고 있으니까요. 그 많은 기적을 베풀고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죽긴 왜? 죽습니까? 죽지 말고 영화를 누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죽는다??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니 제자들이 난감한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그런데 신앙이란? 기존으로부터의 이별을 전제하고 있어요. 떠남을 강요받게 되어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을 입게 된단 말입니다. 구원이란?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의 이별이지요. 아픔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근심이 가득 찬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하늘에 것을 가득 안고 오십니다.

하늘에 신령한 복들을 듬뿍 안고 오십니다. 세상말로 바리바리 싸들고 오십니다. 죄사함을 안고 오시고! 부활을 안고 오시고! 영생을 안고 오시고! 천국을 안고 오십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근심 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역설이면서도 또한 반전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는 겁니까? 본문 설명 (십자가)

근심 없이 기쁨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죽음과 부활은 1세트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은 어미와 같고,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은 아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새 사람은 옛 사람으로부터 낳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사람은 새 사람을 낳아준 어미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속에 담아 놓은 새로운 생명의 낳아짐의 비밀은 반드시 기존의 생명에 죽음을 통하여서 새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씨가 죽어서 나무를 내듯이 육에 속한 사람이 죽음으로서 영에 사람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살아났으면 씨 하나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죽음이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를 버려야 하는 것이므로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새 생명이 낳아 진 것을 보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기쁨이 죽음이라는 고통을 다 잊게 해 줍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기 까지는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낳아진 아이를 품에 안으면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 될 수가 없이 영광스럽고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그 아이를 통하여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살아남을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아픔과 같은 것이지만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제자들 속으로 다시 오시는 것은 아이를 안은 기쁨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함께 공유케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아픔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가신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다 아시고 위로를 하십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잠시 근심에 쌓이게 되지만 곧 기쁨으로 충만 해 질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여자가 아이를 보고 기뻐하듯이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죽음과 부활은 한 셋트로 묶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고난으로 집어넣고 함께 동행하시고자 해요.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뉘라서 이 깊고도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까요?

내가 너희들을 영영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에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 합니다.

 

 

<결론> 믿음 주심으로 두려움 해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셨다가 성령으로 다시 오심여자가 해산(解産)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 안으로 끌어당겨짐을 맛보게 됩니다.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서의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받으면 두려움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시는 것입니다. 갔다가 믿음을 가지고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지금은 근심이 되지만 잠시 후에는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아직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일어날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아이를 낳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여 영광중에 거할 때는 그 고통은 다 사라집니다.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아픔도 그러합니다.

잠시 예수님과 이별하는 아픔은 아이를 해산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처럼 기쁨으로 충만해 집니다. 성령이 천국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기쁨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영광은 이 땅에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하늘에 영광을 맛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 속에 성령의 증거가 생겼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방문을 잠그고 있었어요. 죽음이 두려웠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술 취한 사람처럼 담대함이 생깁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어요. 예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합당하게 기쁨으로 여겼어요. 이건 성령을 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힘이 솟고 기쁨이 충만해 진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16:22>지긍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16:23> 그날에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한 것을 내이름으로(내가 이룬 것으로)주시리라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근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이러한 기쁨이 없다는 것 때문에 근심하고 고민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근심의 내용이 바꾸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고후7: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시작의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관심

고전15:31>형제들아 내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후4:10-11>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출발점이 되어 기쁨인 부활과 생명을 가져왔다면 영원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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