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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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완성의 설교_십자가복음 설교
한광수 2021-10-31 추천 0 댓글 0 조회 1019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02 그리스도 완성 설교_ 발표자​ 한광수 목사

: 십자가 복음 설교

 

 

 

  

. 들어가기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부정적인 경향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설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제대로, 올바로설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설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구약본문 설교의 빈약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구약을 설교하지 않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더라도 성경 계시의 유기적 점진성과 통일성을 배제한 채 복음이 빠진 단순한 도덕적 설교나 인물중심 설교, 알레고리적 설교 등으로 되어버리든지 구약 안에만 머물고 신약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설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제대로, 올바로 설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어떤 본문이든지 간에 성경신학적 해석의 과정을 생략한 채, 계시적이고 언약적이고 구속적인 맥락을 벗어나 설교함으로써 설교의 중요한 관계적 고리를 놓치고 마는 불완전한 설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청중이 듣기에 당장은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설교는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점차 그리스도가 설교되지 않고 인간의 노력과 열심만 남게 되어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 안의 풍토를 볼 때 그리스도가 부족한 설교를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 그리스도 설교의 필요성

 

1. 왜 그리스도 설교여야 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알게 하고,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설교는 교훈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여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복음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해답이다. 그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설교의 주체여야 하며,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할 이유는 성경 자체가 요구하고 있다(고전 2:2 ; 5:39 ; 24:27).

 

2.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의 십자가의 메시지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설교하는 것을 포함한다. ,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핵심에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로 나타난 결과들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을 십자가의 도’(the message of the cross)라고 불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여기서 바울이 복음을 부활의 도승천의 도성육신의 도라 부르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십자가의 메시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구원의 근거를 만드셨다. 십자가 안에는 부활’ ‘승천더 나아가 재림까지 포함된다. 십자가로 이루어진 언약 완성된 세계는 풍족한 모든 것이 그곳에만 있다. 십자가는 복음의 완성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고 십자가 없이 재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활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재림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3. 그리스도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성경 본문과 관계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을 설교하는 것은 다른 예수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는 그것이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성경 본문에서 예수를 설교하는 것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고자하는 자기 결정조차도 죽은 자로서 취급을 받아서 개입할 수 없게 한다(6: 9-13). 스스로 구원받으려 하는 자를 막아내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가치가 십자가로 무너진 상태에서 오직 주님께 공로를 돌리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한다. 심지어 십자가를 전하는 설교자마저 십자가의 능력이 자기를 부인하도록 작용하는 복음의 효력으로 작용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모든 성경에는 구속사라고 부를 수 있는 줄거리가 있다.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정점을 이루며 효과는 계시록까지 미친다. ‘오직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한다. 아울러 성경이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설교해야한다. 성경 본문 없는 그리스도만 설교해도 안 되고 그리스도 없는 성경 본문 설교도 안 된다.

  

 

. 설교의 핵심 그리스도

 

1.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그리스도 완성을 향한 설교이다. 1차적 해석 설교이다. 성경계시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구약본문을 해석할 때 1차적으로 그 본문이 다루는 그 시대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그 본문을 해석해야 하며 후대에 주어질 계시로 무리하게 즉시 진척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1차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성급히 엮어나가면 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본문의 정황을 무시하면 안 된다. 먼저 본문 자체에 충실해야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언급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무리한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묻지마! 그리스도식으로 무조건 그리스도를 갖다 붙이는 곳이 아니다. 본문내용을 구속 역사적으로 이해하였기에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언약 목표(telos)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현되기에 그리스도 완성(christotelic)으로 연결된다.

 

1.1.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의미

기독교의 설교의 근거가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 설교가 존재하고 또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근거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조던(James H. Jordan)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은 이 세상 만물의 존재 자체와 역사의 진행이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을 주장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또는 기독론적 해석 설교란 설교의 메시지의 핵심그리스도 중심적일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해석의 원리가 역시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신학자인 류는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 이외는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느 것으로도 설교의 중심에 서서는 안 되며, 또한 설교의 내용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설교학자인 토마스 존스는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십자가는 거룩한 성경의 중심 교리이다. 다른 모든 진리는 십자가 안에서 성취되거나 반드시 십자가 위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교리도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고 사람 앞에 주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설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메시지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중심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예수님 중심적 설교(Jesuscentric Preaching)'로 오해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설교 때마다 나사렛 예수와 그분의 탄생, 생애, 죽으심, 부활과 승천에 관하여 언급하려고만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러한 경향 자체가 지나친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을 하나의 방법론적 원리’(Methodological Principle)로 생각하여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다.

 

1.2.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특징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춘 설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노력과 수고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설교이다. “...처럼 되라는 메시지는 선한 사람이 되라는 설교와 함께 청중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행동에 소망을 두게 한다. 또 이것은 “...을 실천하라는 말과 같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특권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결국 행위로 완성하지 못한 빚진 자가 되게 되며 청중을 영원히 무가치한 자로 규정짓게 된다.

골즈워디는 모든 설교의 주제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성경 전체를 부분들에 비추어 검토하는 일은 반드시 그 부분들을 전체에 비추어 검토한다는 일과 병행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설교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설교이다. 성경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 39),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5: 46), 예수님과 사도들이 구약 전체를 예수님에 대한 증거로서 간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경 구약 본문이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정경의 역동성을 말하는 것이지 문자적인 전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성경의 모든 본문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행위와 관련되어 있음을 설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떤 특정 본문에 한꺼번에 계시하시지 않고 성경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계시하셨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내용이 씨앗처럼 아주 적게 나타났을지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는 완벽한 구속의 열매 형태로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는 방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14: 9)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성경 어디를 보던지 성경의 중심 내용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어떠한 분이신가에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관심을 갖는 설교이다.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물론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죄인(Sinful Man)’이며 역사에 갇혀있는 존재’(Being in History)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인간의 실존 곧, 존재론적인 딜레마인 인간의 죄성과 편견과 한계(인간의 전적 타락)를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복음이 해석의 열쇠라는 말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적절하게 해석하려면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분의 사역과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모든 성경 본문이 지니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 맞추기가 설교의 주제와 내용을 결정한다고 이해한다. 이 때 성경 본문의 정황이 현재의 상황에 공통점이 있음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위한 설교를 하게 된다.

 

1.3.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동일 개념과 관계 개념

흔히 구속사적 설교(Redemptive Historical Preaching)를 구원을 이루는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 기독론적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라고도 말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구원을 이루는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삼위의 하나님이 구원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 설교나 성령님 중심 설교(권성수는 성령설교라고 표현했다.)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는 구원역사를 성경전체를 배경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으로, 성경전체의 계시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경 신학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성경 신학적 설교(Biblical Theological Preaching)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구속사적 설교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강조한다면, 성경 신학적 설교는 성경의 점진적이고 통일적인 계시를 부각시킨다.

 

그리스도 중심 혹은 기독론적 설교는 구원과 계시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장대한 역사를 증언하기 때문에 구속사적 설교, 즉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설교의 한 방법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말하는 설교철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이고 성경적 설교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루터의 기독론적 설교’(Christocentric Preaching),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설교’(Theocentric Preaching), 그리고 채펠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있어서 동일한 축선 상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삼위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설교로서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다루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중심 해석의 원리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방법으로서의 총체적 해석은 세 영역, 즉 역사적, 문학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 방법의 모든 요소들을 종합적이고 통일된 하나의 전체적 작업으로 다루어야 한다.

 

2.1. 역사적 해석

클라우니(Edmund P. Clowney)성경 신학은 본질적으로 성경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앞으로 움직여 나가는 그 분 자신의 사역으로 간주하고 그 역사를 해석해 놓은 서술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레이다누스는 성경 기록이 쓰여진 때의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문학적 환경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기록의 메시지를 그 원래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그 기록에 대해 역사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적 해석은 주관적이거나 독단적인 해석을 방지하는 객관적 수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설교자가 본문이 제시하는 특정 관점 즉 구속사적 관점을 계속 좇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역할도 한다. 결과적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그 본문의 직접적인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가장 넓고 가능한 맥락 즉 역사의 전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살펴보는 것이며, 창조로부터 완성의 때로 나아가는 모든 피조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실재를 포괄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 곧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를 가리키고 있다.

 

2.2. 문학적 해석

문학적 해석방법은 성경 해석과 설교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는데 이는 본문 형성 이전의 자료들, 문학적 형태, 저자의 의도, 본문의 구조적 패턴들, 주제들, 정경적 규범이라는 맥락 등을 연구하는 하나님 중심적 연구 방법(Theocentric Method)’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에 비추어 특별계시의 진리들이 갖는 유기적 성장을 잘 보여 줌으로 인해 설교자로 하여금 구약과 신약을 연결 짓는 주제들을 드러내 줌으로 도덕주의적 설교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의 구속적인 강해의 흐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설정해 준다. 따라서 정경적 해석을 하려면 문학적 영역을 합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또한 문학적 해석의 또 다른 형태는 정경적 접근방법으로 성경을 그 자체 안에서해석하려는 것이다. 정경을 해석의 맥락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정경만이 규범적이고, 정경이 성경의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문서이며, 현재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채널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2.3. 신학적 해석

설교자의 해석 작업은 본문의 신학적 의도 혹은 신학적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성경 저자의 목적을 알려면 저자가 이 메시지를 왜 기록했는가?’ 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신학적 해석은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목적을 성경 본문에 부과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설교자의 목적이 성경 본문의 목적을 누르고 그 본문을 침묵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과 교묘한 유혹을 피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저자의 목적을 찾아야 할 중요한 이유를 그레이다누스는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성경으로,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그 저자의 관심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들로부터 그 저자의 목적으로, 주위를 돌리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목적을 찾는 것은 모든 주관적인 방해물을 제거함으로써 성경말씀을 순수하게 들으려는 시도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골즈워디는 성경 신학은 성경이 전체로서 말하게 하는 것,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해 한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하게 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성경 신학은 성경을 인간중심적이며 도덕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설교하는 일을 가장 잘 제거할 수 있는 하나님 중심적연구 방법으로 신뢰받을 수 있다. 더욱이 성경 신학은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 짓는 주제들을 드러내 줌으로, 설교자로 하여금 구약에서 신약으로 설교의 흐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며, 현재의 청중을 향해 전달되어야 할 그 말씀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해 준다. 따라서 신학적 해석방법은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으로 연구하게 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이해를 제공하게 함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로 나아가게 한다.

 

 

3. 바람직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어느 본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먼저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한다는 것을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내야 한다는 축소주의로 보지 말아야 한다. 사실 구약과 신약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인간 세상 속에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다룬다. 따라서 삼위의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보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중심으로 보려는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성경 계시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어떤 본문을 해석 설교할 때에 일차적으로 그 본문이 다루는 그 시대까지 주어진 계시의 빛에서 그 본문을 해석해야하며 그렇지 않고 후대에 주어질 계시로 무리하게 즉시 진척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룬 구속사역 중심으로만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 일원론 (Christomonism)적 발상이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해석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주님의 모든 가르침까지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류응렬은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사라진 복음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복음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설교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며 설교하는 목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올바른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선택한 설교 본문을 근접문맥 속에서 일차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후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과 성경 신학적 관점 속에서 본문을 보는 것이다. 본문의 일차적 문맥을 무시하고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성급히 본문을 엮어 나가면 된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라는 문자적인 선입견으로 인하여 본문의 정황을 무시하면 안 된다.

 

구약의 본문을 설교할 경우에도 구약에만 머물러도 안 된다. 구약은 계시의 발전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신약의 빛 즉 계시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빛 없이 구약만을 보는 것은 마치 실체를 무시하고 여전히 그림자에만 머물러 있는 불완전한 해석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문 자체에 충실한 해석을 거칠 뿐 아니라 본문을 독립된 구절로 여기지 않고 성경 전체의 구속적 맥락에서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끌어오기 위해 무리하게 본문을 해석하지 않게 되며, 또한 본문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 계시의 전 역사 속에서 본문을 읽음으로써 성경적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라고 해서 모든 설교 가운데 반드시 그리스도가 언급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언급된다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되고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학적 축을 통해 성경을 조망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정창균은 어느 본문을 택하든 언제나 그리스도를 언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무모한 풍유와 시대를 무시하는 비약을 범하여 오히려 반 구속사적 설교가 되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서 모범적 설교에 대하여 결국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모범적 교훈적 설교라는 설교유형을 설정해 놓고, 이 두 유형을 배타적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이름 아래 결국 본문을 오늘날의 청중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화석과 같은 위치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되기 위하여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나 혹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언급을 끼워 넣으려는 무리한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가지 또 다른 오해가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라고 할 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자인 예수만을 중심으로 하는설교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란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하는 표현이며 광의적 의미로는 이미 성부와 성령을 포함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광의적으로 삼위 하나님 중심의 설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경륜과 구속사의 큰 맥락을 고려할 때 구약은 반드시 설교되어야하며, 구약을 설교할 때는 구약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하며, 구약의 윤리적 말씀들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그리스도의 프리즘을 통해서 설교할 수 있다.

 

 

4.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신학적 근거

 

4.1. 복음의 그리스도 중심성(Christ-centeredness)

기독교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중심이 되시므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교회는 하나님 중심적 본문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할 수 있는가로 인해 몸부림쳐 왔다. 역사적으로 기독론적 설교에 있어서 가끔씩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 즉 하나님과는 별도로 그리스도만을 따로 설교하는 빗나간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경향과는 달리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성(Christ-centeredness)’ 즉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은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방법과 루터의 기독론적 방법 사이에 어디엔가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중심성(Christ-centeredness)’ 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보좌와 통치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것이다.

 

4.2. 성경의 통일성

복음서가 확실한 통일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분명한 다양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이 모순되거나 충돌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풍성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제공한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평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결코 획일적인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성경은 다양하고 때로는 상이한 표현 방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드러난 것이든 감추어진 것이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상상의 비약을 피하려면 무엇이 성경의 의미에 접근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대부분은 성경 전체와 그 메시지에는 매우 기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저 구원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룩한 책들의 모음집 이상의 것이다. 성경 전체를 꿰뚫는 그러한 통일된 주제가 있다면 성경 메시지의 구조(Structure) - 각 부분이 전체에 대하여 가지는 포괄적 관계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구속계시는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성경은 여러 시대의 여러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말씀이지만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책이 아니라 각 책은 일관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계시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계시가 절정에 이른다는 사실은 어느 부분을 본문으로 정하더라고 성경전체의 시각에서 본문을 보게 한다. , 계시의 유기적 성격은 모든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본문의 계시를 고찰할 것을 요구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성경의 통일성에 대해 말하기를 성경의 여러 부분들은 서로 상호 의존적이며, 하나의 전체로서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는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에 성경을 부분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할 것이 아니라 통일된 사상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읽고 설교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펠은 설교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오직 한 가지 중심 사상(One Major Idea)’을 표현하고 반영하며 발전시켜 나갈 때, 이것은 잘 만들어진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오직 한 가지 중심 사상, 즉 한 가지 주제가 여러 사실을 하나의 설교로 결집시켜 줄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오래 기억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설교의 구성 요소들은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 사상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중심 사상을 성경 본문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 해돈 W. 로빈슨(Haddon W. Robinson)은 설교의 중심 사상”(Big Idea)을 결정할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라고 권고한다. 먼저, “이 본문에서 저자가 무엇에 대해서말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한 다음에, “저자가 본문의 주제에 대해 무엇이라고말하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통일성이란, 설교의 각 부분이 한 가지 중심 사상을 지지할 때 가능하다. 여기서 한 가지 중심 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된다.

 

4.3. 계시의 점진성(Revaluation of Progressivity)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점진적 계시의 의미를 성경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주어졌다. 그 까닭은 계시의 과정이 구원의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황창기는 점진적 계시의 개념은 유기체적 특성을 가지며 성경해석에서 사용되는 성경의 유비의 원리의 주된 동기가 된다.”고 말하였다.

계시의 점진성을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하나님의 점진적 활동하심, 즉 인간으로부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인간을 구약의 신학적 유아기를 통해 신약의 성숙기에로 이끌어 가심을 말한다. 그렇다고 구약에는 성숙한 모습이 없다거나 신약에 초보적인 내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계시의 점진성은 계시의 일반적 패턴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는 점진적이다. 모든 성경은 구속의 완성이라는 최종목표를 향하여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완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본문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핸드릭 그래벤덤(Hendrik Krabbendam)역사는 그리스도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하나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창조로부터 성육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라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많은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라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성경의 역사를 잘 묘사하였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완전히 구현되는 하나님 계시의 점진적 성격은 구약의 본문을 해석할 때 반드시 신약의 빛과 연관 지어 해석해야 한다는 개혁주의 해석의 기초를 제공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적 또는 기독론적인 해석이 기독교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해석적 접근방식임을 보여준다. 그레이다누스는 성경의 계시의 점진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의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동할 때 계시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전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진 때문에 구약이 비기독교적이 되지 않는다. 강의 원류는 강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즉 원류는 강이 하류로 흘러갈 때 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구속사는 온 시대를 통해서 만물이 회복될 때 완전히 펼쳐질 하나남의 구속의 계획이 성취되는 단계에서 점진성을 나타낸다.

 

또한 클라우니는 점진적 계시의 개념을 설명하기를 성경은 역사의 과정 속에 주어진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점진적으로 주어졌다. 그 까닭은 계시의 과정이 구원의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언제나 일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들로 결정되는 각 시대(Epoch)에 따라 진행되므로, 계시도 마찬가지로, 정경인 성경 안에 나타나고 구분된 바대로 시대적 구조(Epochal Structure)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그의 저서 ‘Biblical Theology’에서 설교가 일정한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열쇠가 무엇인지 언급하였는데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행위를 명시화한 것이다. 계시의 점진적 과정은 유기적이다. 계시는 씨앗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완전히 자란 후에는 서로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진리의 초기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의 형태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 사실은 역으로 성립된다. 계시는 구원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으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계시는 구원에 대한 설명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각각의 구절이나 기록된 사건, 각각의 성경의 역사 등 모든 것을 활용하신다. 성경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며 성경의 모든 구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데 오로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서만 그가 누구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한꺼번에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성경구절이나 본문 그리고 책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역사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 말은 초기의 계시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와 다르거나 모순된다는 뜻은 아니다.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계시는 구원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했듯이 성경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구절이든지 그 구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성경은 시종일관 한 가지 메시지, 특히 시작과 끝이 있는 점진적인 과정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성경에서 다른 본문이나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본문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가 그렇듯이 때로는 그 구절의 구속적인 요소가 씨앗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를 적절하게 설명하려면, 그 구절이 구속과 관련해서 어떤 내용과 정황을 갖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한다. 본문에 나타난 구속적인 측면이 씨앗의 형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한 열매의 모습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곧 그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설교자가 준비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레이다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또 그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목표에 점차로 접근하신다. 계시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존재하며, 당신의 계획에 따라 시간 안에서 나누어지고, 힘에서 힘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여명에서 한 낮으로 점진한다. 구속사는 실제 역사이고, 통일체이며, 점진적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진하는 이 하나의 역사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알아야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리스고 안에서 세상을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역사의 배후에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가 있고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로 창세기 첫 장에서 계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구속 운동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동반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그레이다누스는 점진적 구속사는 그리스도를 절정으로 하는 구약의 구속 사건들에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것이며,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데 있어서 기초적인 길이라고 전제하면서 점진적 구속사의 길은 모든 구약 본문과 하나님의 역동적인 역사적 맥락 안에서 그 본문이 말하는 것을 보는 바, 그것은 꾸준히 진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궁극적으로는 새 창조에 도달한다.”라고 하였다.

 

클라우니는 계시의 발전을 추구할 때에 성경 신학은 성경 원저자의 단일성(The Unity of the Primary Authorship of Scripture)과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 사역의 유기적 연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구약의 성도는 메시야의 날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된 시대 속에 사는 오늘의 설교자에게 신약은 구약의 말씀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 즉 구약 말씀은 신약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여전히 구약에만 머물러 있는 해석이나 설교는 위험하다.

 

4.4.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명료성이란 개별 구절과 성경 전체로부터 어떤 의미들이 나오며, 이를 어떻게 확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버나드 램은 성경 해석학(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마틴 루터를 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의 명료성을 다루었다.

 

기독교적 성경의 명료성 이론을 규정한 사람은 마틴 루터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의지의 속박(The Bandage of the will)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루터는 성경의 내적, 외적 명료성을 언급하였다.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입장은 사실 해석학 이론과 실제적 해석 모두에 있어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다. 루터는 성경의 외적 명료성은 그 문법적 명료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한 해석자가 소위 언어의 법칙들또는 언어의 권리들”(Rights of Language)을 적절히 따르게 되면, 그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문주의의 언어학적 방법을 성경에 적용함을 의미한다. 성경의 내적 명료성은 성도의 마음과 생각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의존한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마음을 조명하시어 성경의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깨닫게 하신다. 언어학적 도움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의 명료성에 도달하고 이로써 제도적 교회의 해석학적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된다.

 

교회로 하여금 성경의 역사적, 자연적 의미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하여 구약이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게끔 한 것은 다름 아닌 종교개혁자들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되찾을 때 그들은 교회와 구원에 대한 성경적 교리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성경적 교리도 재확립하였다. 따라서 개신교의 해석법은 성경의 명료성이라는 개념에 기초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밖-이른바 무오한 교회-에서 가해지는 해석의 권위를 제거함으로써 성경 자체에 내재된 해석의 원리들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해석하는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 되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itura, 오직 성경)가 종교개혁의 표어가 된 것이다. 해석의 권리는 각 성도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 말이 성경에서 추출된 성경 해석의 원리들을 무시하고 각 개인 성도마다 자기 임의로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적인 설교의 원리는, 첫째는 오직 성경으로, 둘째는 성경 전부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성경 전부를 부르짖으면서 그 원리를 그들의 성경 해석과 설교에 공히 적용하였다. , 성경 해석과 설교의 자료와 성격 그리고 그 과정 모두가 성경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원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 계시 완성 설교

 

1. 십자가 완성의 의미

 

1.1. 영원한 제사와 용서

구약의 희생제사는 죄인과 허물 많은 인간 제사장이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장막에서 인간의 양심에서 진 죄를 씻을 수 없는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연약하고 무익하고 흠이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허물을 완전히 용서하시고 양심의 죄악을 완전히 씻을 수 있는 참되고 영원한 희생 제사를 준비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가 이루어지려면 세 가지 근본 요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진 장막, 그리고 피흘려 죽을 제물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건이 구약 제사의 세 가지 요소를 온전하게 성취하고 완성한 사건이었다고 가르친다.

 

1.2. 율법의 요구의 성취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시고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저주를 폐하셨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다. 만일 율법의 이러한 요구대로 살지 못하면 죄인으로 정죄되며, 죄인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멸망 받아야 한다. 율법은 철저하고도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며 불순종할 경우 사망의 저주를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율법의 요구는 대단히 엄격하다. 살인에 있어서 외면적인 살인만을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 형제에 대해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 자체를 금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본래 뜻을 설명하시면서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5:21-22) 이 말씀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입으로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곧 그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간음에 대해서도, 원수 사랑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내면적인 것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의 태어난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3:19, 23).

 

결국 율법의 요구 앞에 선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어 이미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아래 영원한 죽음을 기다라고 있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2:8). 예수님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시기도 했다(5:8).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13) 그래서 예수님께는 정죄와 저주와 형벌과 죽음이 주어지고, 우리에게는 용서와 은혜와 구원과 생명이 주어졌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한 자가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들이 된 것이다.

 

1.3. 사탄에 대한 승리

예수님은 예언대로 뱀, 즉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의 역사를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일 3:8).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을 택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고 죽으시는 사건은 곧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심판을 받는 사건임을 천명하셨다(12:31-32). 그것은 죄의 권세를 통해 죽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왕 노릇하던 마귀가 정죄 받고 심판을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저주와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정복하고 승리하고 계셨다.

 

1.4. 공의와 사랑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만한 무엇이 있어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연약할 때,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불의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냥 없는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 인간의 죄를 그냥 없던 일로 덮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죄에 대해 의로운 심판을 내리면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 대신 인간이 지은 죄의 형벌을 받는 길이었다. 이 대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해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을 동시에 확증하신 것이다(3:25-26 ; 요일 4:10).

 

1.5.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창조, 섭리, 보존, 구원, 구속, 교회, 심판, 완성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십자가 사건이라는 최악의 사건을 허용하시고 그 사건을 통해 최대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절대적인 영광이다(50:2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이 지니고 계신 신적 영광의 다양한 면들을 가장 극적이고 탁월하게 보여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절정인 것이다.

 

 

 

 

2. 그리스도 완성의 설교

 

그리스도 완성의 십자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이다. 구약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예표이다. 신약은 약속에 대한 성취로서 완성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언약 완성은 예수님이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다 이룬 것이다. 그러면 전에 있는 언약은 옛 언약이 된다. 옛 언약은 옛 사람과 관련되어 있고 새 언약은 새로운 피조물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새 언약을 알 수 없다.

 

그리스도 완성의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내용을 완성하셨다는 설교이다. 그래서 해석에 있어서도 말씀이 이루어진 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완성의 설교는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들을 신약의 관점에서’ (From the Perspective of the New Testment)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Christotelic Interpretation)은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종말의 견지에서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 목표가 달성되고, 완성된 입장에서 구약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신구약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열쇠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 완성의 성경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핵심이심이 전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 저자가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본문의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친히 왕국이 되신 그리스도 인격(Person)과 그 사역(Works)십자가 중심으로 오늘 청중에게 주는 의미를 파악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 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렌즈가 필요하다.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Christ-centered Interpretation)과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Christotelic Interpretation)은 비슷한 개념이나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비슷한 점은 성경, 특히 구약 본문을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인 십자가와 통합시켜 해석하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점은 종말론적 맥락에서 성경을 보는 방향의 차이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은 1차적으로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후 구약에서 신약을 향해 읽는다. 그런데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해석(Christ-driven Hermeneutic)으로 저자의 입장에서 신약에서 구약을 다시 2차적으로 읽어 이해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 신약에 나타난 계시의 충만함으로부터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약 저자들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말세 또는 종말(Eschaton)이 왔음을 믿는다.

따라서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은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종말의 견지에서 성경을 풀이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목표가 달성되고, 종결된 입장에서 구약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약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모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그림을 참조해서 클라우니의 말을 들어보자.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상징(Symbolism)과 모형론(Typology)의 연관성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에 상징이 있다면, 우리는 예표를 추론할 수 있다. 상징이 없다면 모형도 없다. 상징은 구약에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나타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모형론적인 해석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하였다.

 

 

 

왼쪽 하단의 구약의 인물이나 제도 혹은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실을 상징한다. 먼저 역사적 및 문학적 해석을 통해서 그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추출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 없이 오른쪽 하단의 설교로 직접 가져와 적용시킬 때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하나님과 구원한 무관한 도덕주의()로 전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의미인 T1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여기에서 모형은 그와 대응되는 원형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확인된 원형의 의미 Tn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모형론적 성경해석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모형론 해석을 통해서 확인된 원형의 의미가 오늘의 청중의 삶에서 적용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사각형에서 주목할 것은 구원 계시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필자는 총체적인 이해와 같은 의미로 본다)가 없이 구약의 인물이나 제도 및 사건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시키려는 실용적(필자는 실용적=주관적인 맘대로‘) 해석을 시도할 때() 그 해석이 알레고리가 되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은 모든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다보는 노력 중에 신약의 종말을 이해하고,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은 신약의 종말의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역사의 흐름 중에, 예수님 당시에 한정하지 않고, ‘만유를 충만하게 하는 완성이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및 복음의 확산으로 이미 만유의 충만이 시작되었으며, 이미 새 예루살렘에 들어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기 시작한 성도의 입장에서, 구원역사를 되돌아보며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 왕국의 후사가 된 성도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것을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엔스(Peter Enns)는 완성적 해석의 실례를 들어, 마태복음 215절에서 아기 예수님이 헤롯왕의 위협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출애굽이 구약 호세아서 111절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본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하지 않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기록하였다.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피난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오는 출애굽과 하나님의 아들이요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동일시함으로 호세아의 예언의 목표가 이룩된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Jesus Event)을 이스라엘 사건(Israel Event)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호세아서 말씀을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결과 호세아가 먼 훗날을 예측하여 예수님께 맞아 떨어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속목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목표달성 입장에서 호세아서를 되돌아본 해석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황창기는 엔스가 제시한 바와 같이 고린도후서 62절에서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말씀에 인용된 이사야 498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바울이 인용하는 것은 이사야 498절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한 후에야 이 구절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리스도 완성적 입장에서 이사야 498절을 새롭게 이해하고 고린도후서 62절에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역사적, 문법적 해석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구원사역 목표가 완성된 종말의 입장에서, 즉 신약에서 구약을 되돌아보니 이사야 498절은 그리스도를 지시한 것으로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을 소개하였다.

 

사실 구약의 모든 주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적 및 결말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문법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해석이 필수적이지만 종말론적이며 그리스도 완성적(Christotelic)이 아니면 성경을 신약성도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24: 27, 44 ; 5: 39-46 ; 벧전 1: 10-12).

 

이와 같이 신구약 전체는 다양한 신학적 표현 가운데서도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동일한 말씀으로 그리스도가 그 핵심이다. 실제로 이미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함께 하늘에 앉힌 자로서, ‘그리스도의 살려주시는 영으로 새 사람의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으로 구속사적 성경 해석과 그 적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혀질 것이다.

 

엔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체 역사의 중심이며, 그의 십자가로 인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사도들은 성경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Body)된 교회를 이루는 백성에게도 집중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죄를 받아들여서 죄를 원료로 해서 그리스도의 피를 매개로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다.

 

구약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였다. 신약에 와서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아닌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그와 연합한 성도 역시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새 창조에 참여한다. 구약은 주 함께의 시대라면 신약은 주 안의 시대인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은혜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과 동행해 주셨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때로는 성막과 성소를 통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자기 백성을 성전 삼아 그들 안에계신다.

 

그리스도 완성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루심이 시간적으로 창세전까지 소급되어 간다. 창세전부터 베드로가 태어나야 될 것까지 예수 안에서 이미 확정된 사실을 성령이 임하고 난 뒤에는 창세전까지 가서 한꺼번에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처소가 시간과 공간을 능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안과 밖은 자기 몸 중심이어서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몸으로 바뀌면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것이다. 몸 안이라는 의미는 장소가 아니고 몸 안에 있는 기능을 말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 에 가나 지중해 폭풍 속에 있으나 예수 믿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으나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언약 안에서 활동하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방법으로 성경본문을 신약 쪽으로 그리스도의 프리즘을 통과시켜 이해해야 하듯이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은 성경본문을 구약 쪽으로 그리스도의 프리즘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그 이전에 가려진 모든 것을 벗겨내는 것이 해석의 열쇠임이 성경해석과 설교에서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적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신약에 기록된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구약을 이해 적용하는 그리스도 완성적 해석은 성경의 무오성(Inerrancy)과 권위(Authority)를 더욱 확고히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복음, 즉 우주보다 큰 만유적인 인격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다시 사신 그의 사역을 시간에 묶여서 복음이 시간에 속박되고 역사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완성의 중요성을 정리하면, ‘다 이루었다는 그리스도 완성의 의미는 시간적으로는 역사 진행의 종결을 이루는 종말이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지는 성취이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까지 잇대는 이루심인 것이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정죄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라면, 신약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완정된 영역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영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적으로는 과거까지 소급 적용되는 것은 물론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까지 미치는 복음의 효력이 작용한다. 공간적으로도 만유 안에 충만하게 미치는 복음이며 만유 위에 계신 주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만족을 나타난다. 성경적으로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이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 완성인 십자가 복음이 임하면 창세기에 시간을 깨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구약 전체에도 동일하게 해석된다. 신약의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아울러 이는 주님의 창조부터 초림과 재림까지 미치는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완성의 복음은 온전한 복음인 것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식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언약)이었다. 신약 때 와서는 그 언약들의 완성체인 새언약인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나라가 완성이 되고 종결이 된다. 이처럼 십자가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이 완성된 이스라엘 즉, 거룩한 구원받은 백성이다.

 

십자가란 모든 말씀을 다 이룬 상태이다. 십자가 안,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말씀 성취가 이루어지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생명이 주어진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의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세상에 어떤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 완성의 복음을 전하면 주님께서 변화시켜 가신다. 우리가 나서서 변화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지 말아야 한다, 완전한 복음의 능력은 지속적이고 영원한 효력이 있다.

 

 

 

3. 십자가 복음 설교

 

3.1.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언약의 십자가가 신약에서는 모든 기존의 개념과 인간의 지혜를 부수는 것처럼 구약에서는 언약이 그 당시 모든 우상과 거짓 종교를 부수는 역할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성경의 역사는 언약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구속의 역사이며 교회는 이러한 구속사의 과정가운데 존재한다. 그 핵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며 그 언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총괄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며 그 언약은 점진적이며 구체적이고 발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는 언약의 역사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노아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언약관계의 영역 밖에 있었던 기간은 없었다. 결국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의 예언과 성취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 등에서 언약을 말할 때, 언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 회복을 위한 거대한 창조경륜과 구속적 계획의 실현이다. 따라서 인간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일반역사 역시 언약중심으로 해석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들이 추구하며 이끌어 가는 역사는 본성적으로 그 언약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의 죄악의 역사를 만들어가게 된다. 노아시대의 홍수심판도 결국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말씀을 떠난 인간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이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인 반면에, 언약을 벗어나서 행하는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따름이다.

구약에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약속의 땅은 언약의 원칙이 적용되는 곳의 모형이다. 신약의 천국은 언약 완성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들을 곧바로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지 않고 광야 길로 이끄셨다. 그것은 언약을 모르는 채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언약으로 통치되는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권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이는 인간 속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내어 언약의 본질을 그들 앞에서 펼쳐 보이기 위함이었다. 극심한 상황과 형편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언약을 모르고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언약으로 감사하는 이스라엘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언약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예수님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언약 안에서 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언약 안에서 구원된 자로 발견된 것은 동일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존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일관성 있게 일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아 나온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초점이 모아질 때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이다. 언약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십자가 복음이며, 이 복음은 우주 만물 안으로 충만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언약의 특성이 다양하게 보이지만 언약의 본질은 같은 맥락 속에서 연속적이고 통일적인 것이다.

 

노아 언약은 땅의 회복이 주어진 것에 대한 것이다. 은총을 베푼 증거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다. 언약 거부 자는 덮어줌의 원리를 모르는데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복의 민족의 출현이다. 은총을 베푼 증거는 할례 받은 자식의 희생이다. 언약을 거부하는 자는 선택행위를 무시하고 혈통우선권을 주장한 것이다.

모세 언약은 율법을 어겼는데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은총을 베푼 증거물은 법궤에 발린 피에 있다. 언약을 거부하는 자는 이방 나라입니다. 거부한 것은 선택된 국가는 오직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택을 거부한 것이다.

다윗 언약은 선택된 왕이 따로 존재함에 있다. 은총을 베푼 증거는 성전과 선지자의 고난이다. 언약을 거부하는 자는 힘으로 유지되는 국가와 종교를 수립하고자 한 정치적 왕들이다.

새 언약은 심판주가 이 땅에 내려오심이다. 은총을 베푼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다. 언약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의 종교적 의와 성과를 축적하며 인간에게 선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집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기 위한 언약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이 중심이다.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증거 될 때는 이 중심에서 벗어난 세력과의 끊임없는 영적투쟁이 일어난다. 이 땅에서 영적투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확인해주는 현상이다. 구약성경 전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내막을 증거 하는 것이다. 엘로힘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과 인도하심에는 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약속으로 오시는 분이 이루시는 과정이 나타난다.

 

이제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정과 욕심이 못 박아진 십자가가 출발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신약 없이 유대신학처럼 구약을 해석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것이다. 신구약 관계에서, 구약과 상관없는 신약의 내용이란 없다. 모든 것이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완성의 복음은 구약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시작해서는 안 되고 신약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 주님의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인이 결정해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말씀이 결정짓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 놓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세상의 특징들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의해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하여 성경을 해석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축복과 저주는 사람 하기 나름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복음이 중심이 되어 은혜로 축복이 주어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언약을 이루시는 데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처음과 과정과 끝이 그리스도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3.2. 만유에 충만한 십자가 복음

구약은 희미한 계시처럼 보이기 때문에 계시의 점진적인 진정과 확대 상승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일반계시라고 일컫는 노아언약(5:45: 비를 내리는 것, 8:22: 심은 대로 거두고 추위와 더위 등 땅이 보존되는 것)마저도 정결한 짐승의 희생 즉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특별계시가 된 것이다. 일반계시는 구원과는 상관없다고 보는 경우는 일반계시로만 이해되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일반계시마저 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특별계시이다.

 

그러므로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역사 속에서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속에서 완성되었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이제와 영원까지 만유에 충만한 복음이 된 것이다. 십자가 복음의 효력은 노아 때까지는 물론 만유와 만유 위에 그리고 장차 시간적으로 미래까지 이미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이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게 이미 십자가로 완성되어졌기에 종말시대를 산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십자가 복음은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은 말씀대로 사는 것말씀이 이루어진 대로의 사는 것의 두 현실을 다 보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을 이루셨다는 것을 계속 유지 시켜주시는 현재적 주님의 일하심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날마다 죽노라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에서든지 이제는 말씀이 이루어진 내용으로 그 본문 말씀이 완성된 세계 속에서 해석된다. 인간들의 말씀대로 이루려는 시도와 함께 죄악이 드러나며 그 배후의 실체가 십자가에서 패배하면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은혜가 주어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십자가 복음 설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 십자가로 나누어지는 데, 역사의 시간적으로는 십자가 지실 때 휘장이 찢어지는 그때이다. 그 이전은 구약이 되고 그 이후는 신약이 된다. 이제는 십자가로 이룬 내용이 모든 만유에 적용되어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된 말씀들인 모형적이고 점진적 계시로서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이 온전한 계시가 된다. 구약의 예표가 실체로 바꾸어지고 그림자가 빛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휘장이 찢어질 때, 성취된 내용들이 성경전체에 적용, 즉 과거인 구약에 소급되어 적용되고 현재와 미래 계시록까지 효력을 나타낸다.

 

구약의 실제적 인물이나 사건이나 제도나 절기들이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리스도로 재해석되어지며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구약의 역사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과 역할을 한 모형이나 예표였던 것이다. 모형과 같은 구약의 틀 속으로 그리스도 십자가로 성취된 복음이 들어가서 율법과 선지자로 언급되었던 율법이 복음으로 바뀐다. 그림자가 실체로, 부분 계시가 계시 전체로의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된다.

이제 창세기를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되고 그 때 살았던 언약백성에게는 그 당시 장차 나타날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적으로 찾아들어가는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구약의 본문 내용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한 모형을 찾아서 역사적 계시의 점진적 진전과 확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 완성한 세계인 십자가로 그 본문을 읽고 적용해야 한다.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나 절기 등 구약 역사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을 역사 속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가 되셔서 이루신 내용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영지주의가 되어 상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허구적 신을 쫒아가게 된다. 우화적이고 풍유적 해석으로 유대신비주의로 전락할 수 있음에 주의할 것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멈추어버리면 도덕설교나 알레고리 설교나 율법주의 설교가 되어버린다. 설교할 때, 꼭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복음 설교가 아닌 것이다.

 

이제 십자가 복음 설교의 몇 가지 예를 신약성경 본문을 통해 시도해보자. 예를 들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13) 라는 말씀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12-13)

문자적으로만 보면 마치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 성경구절의 전반부만을 보면 너희가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신다고 하심으로써 명령문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임은 알 수가 있다. 십자가로 구원이 이루어진 완성의 세계인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또 다시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주님이 이미 이루신 내용이 적용되는 것을 증언하는 삶으로 살아달라는 것이다.

 

다른 성경 구절로 상호 연결하면 더욱 해석이 두렷해진다.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주님께 붙잡힌 바를 이루려고 달려가노라”(3:12)

사도 바울은 이미 이루심(붙잡힌 바)을 경험하기 위하려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는 가정아래에서 주님의 인도함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루심은 단회적 사건이지만 성령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현실이 되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서 완성을 위한 시작이며 움직임이다. 못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루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어떻게 완벽하게 이루셨는지를 주님께서 현재로 우리에게 계속 이루고 계신지를 보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복음서의 이적과 기적의 사건의 본문을 다룰 때, 십자가 지시기 전에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온전한 표적인 십자가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예수님이 이루신 완성의 표적인 십자가로 보지 못하면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

누가복음에서 문둥병자 10명을 고치는 사건을 보면, 그들 중 아홉은 기적(예표)을 경험하고 병 고침을 받았지만 표적인 제사장 되신 예수님께 도달(그리스도 완성의 세계)하지 못하였다. 단 예수그리스도께 돌아온 한명만이 병 고침의 기적이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임을 알아 시간적으로 그때 당시 곧 짊어질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예약된 영생이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때에 적용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를 들어보자. 이 기적을 맞본 사람들은 이 땅의 그림자적 왕국을 세우는 경제적 메시아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십자가에 완성된 복음으로 재해석하니 영원한 왕국에서 양식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주님을 알게 하신다. 이 땅의 양식으로만 경험되어지면 영생이 없고, 하늘 양식으로 경험되어지면 영생이 주어진다. 실체를 경험할 떼 온전한 복음이 된다.

구약본문 뿐 아니라 신약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시기 전의 행적과 사건들도 부분적이고 예표이었으나 실재로 전환되어 해석된다,

 

이번에는 율법과 선지자인 강령인 사랑하라는 본문을 대할 때, 십자가복음으로 설교하려면 먼저 해석에서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셨다(10:4 ; 13:10 ; 5:14 ; 4:9-10).”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는 요청이 왔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완벽하게 말씀을 이루셔서 주어진 사랑을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다. 우리는 주님의 열심이 완벽하게 이루신 그 사랑을 간직하며 그리스도와 살면서 날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때 사랑하려고해도 안 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성령의 책망으로 회개하게 된다. 그러면 나의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십자가 사건이 현실 속에서 터지고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경험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설교를 하고 듣는 이들은 이미 주님께서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현장에서 목격자이자 증인으로 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517절을 보자. 계명으로 읽혀지는가 아니면 언약으로 읽혀지고 언약완성인 십자가로 경험되어지는지 확인해보라.

 

누가복음에서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을 물었을 때, 율법을 다 지키고 율법의 의를 가지고 왔으나 그림자 율법을 붙들고 진정한 표적인 십자가를 따르고 경험하지 못하고 떠났던 것이다. 소유라는 그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했다. 십자가 복음의 효력이 적용되었다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내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알고 나에게 맡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소유가 그를 붙잡고 있으면 벗어날 길이 없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회개하게 된다면 영생을 얻지만, 나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바라본다면 아직 실체의 복음을 보지 못한 맹인인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전체적으로 십자가 완성의 전편과 후편을 잘 그려주고 있다. 십자가로 완성된 복음을 충만하게 하시는 내용들이 사도행전에 나오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 지시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는 누가복음과 이미 이루신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가는 내용인 사도행전에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행하신 첫 표적으로서 포도주 만든 사건이 나오는데, 처음과 나중을 비교하여 나중 것이 더 맛이 좋았다는 내용이다. 이를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한다면 그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단지 육신적인 포도주 기적의 맛을 보았지만,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완성의 빛으로 돌아보면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비교한 것으로 경험되어진다. 여기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로 미완성된 상태 속에서 추구하는 인간들의 육신의 죄악 된 모습과 주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이 서로 대조적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안다. 그래서 새 시대가 왔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구원받은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면 영원히 멸망하는 자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지금도 영생을 얻은 자로서 죄가 품어져 나올 때 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죗값을 지불해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완성의 해석으로 마태복음 16장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을 보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의 고백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칭찬을 하신다.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백을 성령께서 잠시 가르쳐주셨으나 성령을 받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는 십자가의 완성된 복음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표피적으로 고백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백을 한 후 바로 예수님에게 꾸중을 듣는다.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니 장차 완성될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스스로 고백한 내용을 그리스도 완성의 십자가로 읽어내지 못하고 이 땅의 왕국에서 탐욕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는 역설적으로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십자가 지시고 난 후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성령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완성된 복음으로 되돌아보니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따라다녔던 것을 죄악 된 모습을 낱낱이 보게 된다. 그런데도 그에게 용서하시는 사랑까지 알게 되고 이때 회개가 나오게 된다. 이 양쪽 부분까지를 설교하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어느 한쪽만 설교하면 인간 탐욕적 기복신앙이요 또 다른 한쪽만 설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단지 교훈적인 생활양식이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가 되지 않은 나와 관계없는 이론이며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아무 내용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구약(3:10)과 신약에 나오는 십일조(23:23) 본문을 가지고 그리스도 완성인 십자가 복음 설교를 해보자. 이 때는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율법과 계명이므로 이를 행하여 복 받자라는 율법 설교만 나온다. 그러나 그리스도 완성의 십자가 복음 설교를 하면 그 율법과 계명이 복음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된다. 각 교회마다 분란이 일고 있고 심지어 신학자간의 논쟁이 있는 십일조 문제는 복음을 알게 되면 십일조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보의 문제가 말끔히 정리가 될 것이다. 주일성수 설교에 대해서도 십자가복음 설교로 실제로 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십자가 복음으로 살고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면, 이미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신 십자가 복음은 이후에도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감사하고 우리의 항상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된다.

 

 

 

 

 

. 나가면서

 

구원의 능력으로서 십자가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주의 할 것은 십자가 외에 구원, 영생, 부활, 하나님 나라, 임마누엘 사상,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의 주권을 전한다면 그 자체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전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우리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복음의 결과들인 구원과 영생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등은 십자가 복음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십자가 없이 부활을 전하면 인간들의 구원 욕구가 발동하여 자기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게 된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인간의 주체성을 가진 모든 것과 개념을 부수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일러 주신다. 그래서 설교 내용과 설교 방식과 설교전달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나오는 것이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부요한 것들이 공급 된다. 공급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분의 은혜가 중요하다.

 

십자가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행위 일체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다(3:3 ; 3:8-9). 십자가는 그리스도만의 유일한 실재이자 사건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실재이자 사건이다.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는 시작과 끝이 서로 맞물려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결과가 영생(3:12-15)이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참 지식(8:28)이요, 모든 민족을 하나로 묶는 연합(12:32 ; 1:10 ; 1:16-20)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통일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런 궁극적인 결과를 이루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찬 때,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함께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몸과 자신과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부인될 때 그리스도께로 연합된다.

 

설교자가 십자가 복음을 설교할 때, 그리스도 완성의 메시지가 되는 동력은 십자가이다.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내용도 방식도 수단도 목적도 모두 십자가이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의 내용과 동일시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13:13).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복음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다. 수치와 능욕의 십자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복음 전하면 전하는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살도록 요구받게 된다. 십자가 복음, 즉 생명을 주는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자에게 십자가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셨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만약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설교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청중들은 그리스도를 보지 않을 것이며 보지도 못할 것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전달 방식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나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데에 설교자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 내용인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내용보다 설교자가 중심이 되거나 설교 전달 스타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십자가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보다 행위를 선호하고,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힘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추한 것보다는 좋을 것을 선호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불렀다(3:18). 십자가에서 드러난 고난의 모습을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만, 영광의 신학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모습이 감추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고 그 행하심은 십자가 사건으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앞이 아니면 인간들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죄와 교만과 목이 곧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3) 사도 바울이 말한 '죽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결코 우리를 '살려냄'에 있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 속에서 구원하여 사용하심을 말씀한 것이다.

말씀이 성도 안에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늘 성도를 죽이시면서 말씀 자체의 능력인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이 증거 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5:17). 예수님이 일하시니 성령님도 일하신다. 성령님이 일하시니 설교자도 복음을 위하여 일한다(10:14). 주의 종은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다 주님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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