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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말해야 될 이유
한광수 2021-07-05 추천 0 댓글 0 조회 922

십자가를 말해야 될 이유

 

인간은 피조물이다그리고 그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골 1:16). 따라서 성도라면 마땅히 다음과 같은 과정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로마서 11:36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원칙과도 일치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런데 만약에

'부족한 자아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로 진행되는 코스가 등장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비복음적이다.

즉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으면 '절대 자아 추구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의 코스를 밟게 한다.

이렇게 되면성령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아니해서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즉 "나도 거듭났단 말이야나도 주의 종이란 말이야나도 구원된 자 맞단 말이야"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떤 식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여기서 십자가만을 말해야 될 이유가 나온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죄의 지배와 마귀의 지배를 받아 왜곡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밝히는 사건이다인간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하셨다.

이것은 평소에 자신조차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달리 말해서 죄의 권세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권세 아래 놀아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그런데 십자가 사건 앞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죄의 지배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지배로 인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떠밀어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이것을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말해서, '행함을 의지했다'고 했다(롬 9:32;33).

즉 메시야의 십자가가 인간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오직 하나인간들이 '행위에 의지해서모든 진리와 죄와 구원을 논하고 있는 그 점에 있었다는 것이다인간들이 자기 행함에서 '죄의 권세'가 나온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예수님이나 혹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함부로 대한 것이다그래서 터져 버린 사태가 십자가 사건이다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지 아니하면그 인간은 여전히 날 때부터 자신은 죄의 권세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그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거듭난 의로움이나 거듭난 양심이나 거듭난 착실함이나 거듭난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면 죄의 권세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쉬운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성격이 급한 남편에게 아내가 자꾸만 뜨거운 국을 가져다준다그래서 남편은 맨날 혓바닥이 데기만 한다화가 난 남편이 말한다. "왜 당신이 뜨거운 국물을 주느냐?"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본인이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알게 하는 방식은 그 방식밖에 없어요"라고 말이다.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행위에 의지해서 죄를 이겨보려고 애쓰는가 하는 것은메시야마저 인간들의 본성에 의해서 떠밀려 죽게 되는 십자가 사건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밝혀낼 도리가 없다십자가로 메시야께서 인간에게 다가서는 방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전에 의도한 일이다우발적으로 벌어진 사태가 아니다철저하게 계획된 일이다그리고 이 일을 완수하면서 비로소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그것은 저주였다하나남의 저주였다예수님의 저주받음은 이미 모든 인간이 저주 아래 놓여 있음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것이다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저주성을 거부한다자신의 저주성을 거부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의 품성이다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단결하여 다음과 같이 외쳐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저주할 리가 만무하다저주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 리가 없다저주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독생자를 보내시겠는가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희생하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 있었다율법의 개입이 그 사실을 분명히 한다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의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이미 오랫동안 지내왔음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나온다예수님이 받는 저주는 예수님만 받은 저주가 아니라 우리 인간도 함께 받는 저주이다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굳히는 말씀이다만약에 이 저주성으로 출발하면 이 저주로부터 구원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거듭난 자아 예수님의 십자가'

쉽게 말해서 못이 판자에 단단히 박혔으면 자신의 박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망치 자체를 증거하라고 못이 못으로 있는 것이다이미 저주받아 마땅한 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증거하기 위하여 긍휼과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4~8)

그런데 이 저주성으로 출발하지 아니하는 구원의 공식은 '자아→ 예수님의 십자가거듭나나 자아(절대적 자아)'가 되어 버린다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아를 절대 자아로 변모하기 위한 이용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듭나서 구원받는데 성공했음을 증거하는 '자아 절대성을 위한 증거'가 되어 버린다이런 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계속 십자가에 못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하려 한다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 '거듭난 자아'를 증거하는 것이 구원의 목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언약의 완성을 증거하는데 자신이 동원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언약을 말씀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뿐이다여호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가 돌아가고긍휼을 입을 자에게만 긍휼을 입히시는그런 독특한 하나님이시다(33:19).

이 원리가 '언약'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전달되는데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4~6)

이 말씀에 보면언약 과정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구원할 자기 백성의 의롭지 않음과 교만함을 부각시킨다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만 하나님의 언약이 달성되고그 목적도 오직 '언약 달성'에만 있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이다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에게 구원될 자격이 있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거하라는 말이다이 언약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이고 그 행하심은 십자가 사건으로 다가온다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앞이 아니면 인간들이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죄와 교만과 목이 곧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거듭난 자아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듭난 자아거듭난 자아거듭난 자아'를 되풀이하는 자들이 있다거듭난 자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올라오지를 못하는 것이다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처음 '자아의 절대성(나도 구원받을 수 있음)예수 그리스도'라는 틀로 시작하면서 나아갔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이상 도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이 사람들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이들은 이해하기를이미 살게 된 자에게 '죽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그들 식으로 생각하기를 사도가 이렇게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살았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느니라"라고 말이다이제 두 번 다시 죽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사도가 왜 '죽었다'는 표현을 성도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가 하면하나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결코 우리를 '살려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하기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셨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같은 취지의 말씀이 고린도후서 4:10~12에 나온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사도가 성령 안에서의 능력을 말하는 대목이다이 대목에서 '죽음이 우리 성도 안에서 활발하게 작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 구원 희망예수 십자가자아 구원 성공'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사도의 이런 주장은 납득이 되지 않게 된다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성령의 능력이란 사도 바울의 주장과는 달리 다음과 같다.

'죄 때문에 나에게 죽음 왔음예수님의 생명성령 안에서 활동죽음이 관여하지 않는 상태로서 성경 말씀을 본격적으로 제대로 지키기 시작함이로서 나는 구원된 것이 확실함'이 되기 때문이다하지만 사도의 생각은 이렇다. '새언약성도에게 찾아듬새언약(십자가 완성)만 증거됨이다이 과정에서 성도는 '일 한 것도 없이 죄만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언약(예수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았기에 날마다 십자가 안에서 죽고 또 죽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조치임을 증거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그것은 날마다 주님께서 분주하게 일하시기 때문이다어떤 식으로말씀이 성도 안에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늘 성도를 죽이시면서 말씀 자체의 능력은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이 증거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후 7:9-10)

이 말씀이 바로 사도가 성도들을 권면하는 취지이다회개와 회개의 연속이다권면하는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의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할 것이며구원에 이르는 근심이 없으면 이떻게 회개를 할 것이며이 회개가 없이 어떻게 인간들이 값없이 주신 십자가 공로를 쳐다 볼 수 있겠는가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안한다왜냐하면 뭘 해봤자 죄로 규정받고 드러나고 회개할 꺼리 밖에 안 되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일은 일대로 실컷 하고 욕은 욕대로 실컷 먹을 짓을 왜 하겠는가라고 타고난 자존심에 준해서 요령을 부린다이 사람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틀이 붙박혀 있는 자이다.

'자아가 구원받기를 소망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았음이제 나의 의로움이나 자존심이 훼손되는 않는 방향으로 몸조심이나 하자'라는 식이다이것도 역시 줄이면 다음과 같다.

'절대 자아 추구예수 그리스도절대 자아 달성'이다.

시간론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역사묵시역사'.

심지어 이런 자도 있다. '절대 자아 추구예수 십자가 공로(예수님 영광거듭난 자아예수님 영광)절대 자아추구'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요 5:17). 예수님이 일하시니 성령님도 일하신다성령님이 일하시니 성도도 복음을 위하여 일하게 되어 있다(롬 10:14).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다 주님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게 되어 있다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을 나태나 방종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는 자의 입에서 쏟아지고 쏟아지는 말은 오직 하나 뿐이다.

"주여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목이 곧은 백성입니다(롬 9:3). 이것이 언약이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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