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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온가족예배_요11:17-27[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활생명]
한광수 담임목사 2021-04-25 추천 0 댓글 0 조회 652
[성경본문] 요한복음11:17-27 개역개정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11:17-2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활생명” 2021425

 

나사로 집안에 우환이 덮쳤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든 것입니다. 나사로의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위급한 상황을 알립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가정에 왜 난데없이 병마의 그림자가 드리워질까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상황이 가정과 주변가운데 현실적으로 많이 직면하는 경우이지요.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은 우연일까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40>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십니다.

 

위 본문 말씀에서와 같이 나사로에게 병을 주신 이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병들면 고쳐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하나님이 좋지 않습니까?

 

9:1-4>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부모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시면서 때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고쳐주십니다.

 

우리 성경 전체의 기본적인 내용을 잠시 살펴보아요.

하나님의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십니다.

43:3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이니라

주님을 위한 창조이며 주님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지요? 하나님! 우리를 위한 창조이며 구원이지요?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내 중심의 사고방식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빨리 병든 자에게 찾아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더 시간을 지체를 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애가 탑니다!

11:6>에서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이틀을 더 요단강 건너편 그곳에 머물고서야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재자들은 말립니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는데 왜 또 그리 가시려합니까?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사람들이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는다빛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 사는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죽음이 와도 빛의 나라에 사는 자가 된 고로 유대인들의 위협이나 마귀의 공격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습니다. 잠들어 쉬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느니라하십니다.

11:15> 내가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있지 않은 것이 더 기쁘다! 왜냐하면, 너희로 믿게 하려는 것이야!

 

 

17>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이미 나흘!

많은 조문객들이 나사로의 유족인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위문하려 몰려들었습니다.

20>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마르다 집에 심방을 합니다. 나사로가 아플 땐 빨리 심방을 좀 해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죽고 나니 온 겁니다.

이러면 적개심이 안 들면 인간이 아니지요. 저 같아도 적개심이 들 겁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에요. 죄 아래서 난 몸은 항상 자기 밖에 몰라요. 

그러니 마르다도 예수님이 오빠가 죽은 뒤에 오는 것이 미운 겁니다. 그냥 눈 흘깃 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오셨어요! 웬 일이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심기를 아랑곳 하지 않고 염장 지르는 소리를 합니다. “마르다야 네 오빠가 다시 살아 날거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이에 마르다의 반응은 이런 것 같습니다.

됐거든요! 나도 다 알거든요! 나도 나중에 부활한다는 거 다 알거든요!”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를 달래줍니다.

25-26>“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야 그게 아니고 지금 부활해!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마르다야 네가 이걸 믿느냐!” 그럽니다.

 

그럼에도 서운한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대꾸합니다.

아니 글쎄! 안다니까요?” “좀 비켜 주실래요.” 

내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안다고요!

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는 휑하니 주님 곁을 떠나고 마리아에게 갑니다. 마리아에게 가서는

! 니네 선생님 왔다! 가 봐라! 너 좀 보자고 한다! 아이 참 내!”

단단히 삐진 마르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과 같아요.

유대인들도 모여서 쑥덕거립니다.

 

11:37> “나사로를 그토록 사랑한 사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면서도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두었냐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11:39>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놓으라하시니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헛일 그만하시죠!”

11:40>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더냐? 하시고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이오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옵소서아버지께 기도하신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11:4a>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죽을 병이 아니다고 할 때, “죽지 않을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에서 부활한 몸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인 죽음을 말하고 계신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 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였더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믿고 바라는 것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 에요.

마르다는 부활을 믿었어요. 하지만 오빠의 죽음 앞에선 부활은 관념이고 안다는 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어요.

 

부활이란 먼 훗날의 일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세계란? 예수 안을 말해요. 부활생명은 예수의 생명인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우리나라에 미국대사관이 있어요. 분명이 우리나라라는 영역에 있어요. 그럼 미국대사관은 우리나라입니까? 미국입니까?

미국이지요. 미국의 통치를 받아요.

만약에 대사관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들어가면 영토침범이 되어요.

 

미국대사는 돌아다니는 미국이에요. 이해되세요. 지금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 오셨어요. 천국에서 왔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천국인 겁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백성이 되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천국사람이에요.

마치 예수님처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 말입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으로 인하여 낙망하지 않았어요. 

이런 사람이 육신의 장막을 벗으면 장소적인 천국으로 가요. 거기 가면 다 만나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나사로를 보고 반갑다 친구야! 그런다구요.

 

이 땅에서의 부활이나 천국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시인하는 신앙은 앵무새 믿음이에요. 이게 모두가 배워서 안 믿음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천국이라고 하면 아! 죽어서 가는 곳! 부활이라고 하면 아!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지! 라는 정도입니다.

이게 모두가 신앙을 미래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천국을 나중에 죽어서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부활도 나중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상태적인 것입니다. 상태적이라는 말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 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세 아래 있으면 천국에 들어간 것이나 같아요.

예수님이 현재 몰고 온 천국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믿는 마음입니다.

내가 천국백성이라는 믿음 안에 있으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만 오셨으면 오빠는 안 죽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어떤 장소에 매여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육이에요. 이게 어둠의 사고란 말입니다. 육은 하나님을 고정화하고자 해요.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어 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세요. 이를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고 합니다. 안 계신 곳이 없고 존재치 않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있든지 없든지 개의치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다면 집에 가지 않아도 낳게 할 수 있어요.

그냥 말씀만 하시면 나아요. 실제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칠 때 그렇게 하셨잖아요. 예수님은 이러한 장소적인 개념에 매여 있는 유대교적인 사고의 틀을 깨기 위하여 일부러 나사로를 죽이고 살리는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마치 밭의 가라지와 곡식을 갈라내기 위하여 추수하는 것과 같아요. 가라지는 이미 불 속에 태워질 운명으로 밭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반대로 곡식은 이미 곳간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신분으로 밭에 있는 것입니다.

상태적으로는 이미 갈라져 있지만 장소적으로는 아직 아닙니다. 이는 미완료란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다고 하여도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속담에 업은 아이 사흘을 찾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곁에 두고 찾아 나서지 마세요.

부활과 영생이 먼 나라 이야기도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시다.

 

 

나사로를 왜 죽도록 내버려 주신 것일까요? 다시 한번 반복

이유에 대해서는 4절과 40절에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안에는 어둠이 있었습니다. 이 어둠이란? 죽음의 세력을 말해요. 나사로 안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죽이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인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담은 죽은 의 조상입니다. 그 후손인 우리들은 죽음을 안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산자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떻게 산자로 만든다는 말입니까?

죽은 자를 죽이면서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을 살려주는 쪽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도리여 죽이는 쪽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죽게 하신 것이 사랑입니다.

왜냐고요? 죽지 않은 몸으로 바꿔주기 위함입니다. 어디에서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생명을 얻기 위해 땅의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죽어라! 죽어야 산다!

왜 그랬을까요?

이 육신은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죄의 몸으로 오래오래 살도록 해요. 그래야 마귀가 갖고 놀 수 있거든요.

한평생 마귀의 종노릇하도록 위협을 합니다. 고삐를 잡아 댕겨요.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죄인을 살려주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죽음이 너 까불래! 이걸 확 죽여버릴까 보다!”

그러면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신은 제발 살려주세요. 긍정적인 말을 해주세요. 산다고 해주세요!”라고 해요

이러한 죽음을 없애기 위해 나사로를 죽게 만듭니다. 이때 두려움을 주는 죽음도 함께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사로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을 죽이고 계신 것입니다. 마귀권세를 깨뜨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망은 암덩이처럼 육신에 달라붙어 서 인간을 괴롭힙니다. 인간이 희망을 품고 살고자 하면 할수록 사망이란 암덩이도 기승을 부립니다.

그런데 사망이란 암덩이도 육신이 죽으면 같이 죽게 됩니다. 죽음이 암덩이와 같아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살려둔 채로 암덩이만 죽이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기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산다고 하십니다.

신구약 말씀의 약속은 이 길밖에 없다고 해요. 그 길은 십자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 있습니다만 그 속의 내용을 보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것입니다. 이것만이 부활생명입니다.

거듭 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다시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 몸은 영원히 죽지 않는 몽이예요. 육식의 몸은 사라지지만 부활생명의 몸은 이미 확보한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기백성을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 역설을 모르면 실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종하는 마귀가 십자가를 피하는 쪽으로 데려가서 영원히 불 못에 넣으려고 잠시 겪는 고난을 비껴가게 하고 십자가 얘기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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